* 성 혼 (成渾) *(1535~159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우계(牛溪).호원(浩源).․묵암(黙庵)이며,
학자로서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좌의정으로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파평(坡平) 윤씨이다.
서울 순화방(順和坊)에서 태어났으며,
1539년 파산(坡山) 우계로 이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다.
17세 때인 1551년(명종 6) 순천군수 신여량(申汝樑)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진사 ․생원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백인걸(白人傑)에게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李珥)와 도의지교를 맺었다.
선조 초년에 학행으로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參奉)에
임명되었고, 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서분당기에는 이이(李珥) ․정철(鄭澈) 등 서인(西人)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였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내섬시첨정, 1583년 이조참판,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그리고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등용되었으며, 이때 북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곧이어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어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94년 좌참찬으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이는 그의 학문을 평가하여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외손인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조헌(趙憲) ․황신(黃愼) ․이귀(李貴) ․정엽(鄭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인 윤선거,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즉, 성혼은 이기일발설'(理氣一發說)로 체계화된
그의 성리학은 1572년 이이와 9차례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성혼은 일찍이 이황을 사숙(私淑)하면서 그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주자가 〈중용〉의 서(序)에서 말한
"인심(人心)은 형기(形氣)의 사(私)에서 발하고,
도심(道心)은 성명(性命)의 정(正)에서 발한다"라는 귀절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을 틀렸다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라고 이이에게 물었다.
이이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비판하고 '기발'(氣發)만을 인정하면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천리(天理)와 인욕(人欲)등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하여 마음[心]의 본질이 가변적임을 들어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전개했다. 이에 대하여 성혼은
이황의 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이의 견해를 절충하여
독자적인 이기설을 제시했다. 그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새롭게 해석하여
이(理)와 기(氣)는 시간적으로 선후가 없으며,
동시에 공존하는 까닭에 같이 발한다는 이기일발설을 제시했다.
이기이원론에 대한 이이의 비판에 대해서는 존재론적으로는 이기가
혼륜(混淪)하므로 분개(分開)할 수 없다고 보아 이이의 견해를 지지했으나,
현상적으로 발(發)할 때는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로 분개된다고 보아
이황의 설에 따랐다. 이러한 이기론에 입각하여 사단과 칠정 역시
모두 이기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으나 발할때는 주기와 주리로 분개한다고
보았으며, 사단칠정을 인심도심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서,
사단칠정은 성(性)에서 발하고 인심도심은 심(心)에서 발하므로 의미가
다르다고 보아 이황과 이이를 종합했다.
이로써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주기․절충의 3파로 나뉘어져
중국의 성리학을 뛰어넘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1602년 전일에 기축옥사에 관련된 연유로 삭직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복관되었다. 좌의정에 추증,
15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한편,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병으로 고생하여 실무를 보지 못했으나 여러 차례 봉사(封事)를 올려
국가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1579년에 올린 〈기묘봉사〉에서는
마음을 비우고 선을 따르는 것이 어진 임금의 도리라고 역설했으며,
1581년에 올린 〈신사봉사〉에서는 고금(古今)의 치세(治世)와 난세(亂世)의
원인을 진술하여 현재(賢才) 등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역법(役法)․공법(貢法)에서의 민폐 시정을 위해 혁폐도감(革弊都監)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혁폐도감의 주요임무로
과중한 세금을 거두어들여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법을 버리고
민리(民利)를 가져올 수 있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는 것을 들었다.
1590년에는 〈경인봉사〉를 올려 백성을 보호하고 탐관오리를 다스리는
방법을 밝혔다. 1592년 〈편의시무 便宜時務〉 9조를 올렸으며,
1594년에도 〈편의시무〉 14조를 올렸다.
그러나 '인정'(仁政)의 기초를 닦고자했던 그의 건의는 거의 채택되지 못했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우계집》과
저서에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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