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우(田愚) * (1841-1922)
초휘(初諱)는 경륜(慶倫) 또는 경길(慶佶), 자(字)는 자명(子明),
호(號)는 간재(艮齋),구산(臼山),추담(秋潭), 본관(本貫)은 담양(潭陽)이다.
‘간재’라는 호는 스승인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가 지어준 것이고,
구산’은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곳의 지명이다.
전우는 1841년(헌종 7) 8월 31일 전주부(全州府) 서문(西門) 밖 청석동(靑石洞)
청석교(靑石橋) 앞의 집에서, 청천(聽天) 전재성(田在聖)과 남원 양(梁)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전재성이 충청도 洪州에서 살다가 全州로 移居한 뒤
전우를 낳았다고 하며, 큰아들 慶俊은 큰아버지인 僉正公 田宜聖의 後嗣로 出系하였다.
6세(1846년)에 『소학(小學)』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전우 집안의 가세는 넉넉했던 것으로 보이며, 부친 전재성 슬하에서 일찍부터
유교의 가풍에 따라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9세(1849년) 때에 집 마루에 놓인 화분에
피어있는 매화꽃을 보고 전재성은 문득 자식의 글재주를 시험하여 볼 마음으로
향(香)자 운을 주어 시를 지어보라고 하니,
聽雪鼓絃琴韻冷 눈소리 들으며 거문고 뜯으니 운율이 싸늘하고
看花題句墨痕香 매화를 보며 시를 적으니 먹에서 향기가 나도다.
라고 즉석에서 지으니, 부친이 더욱 총애하고 수학에만 매진토록 하였다.
12세(1852년) 때부터 왕희지(王羲之)의 필법(筆法)을 익혔다고 하며,
14세(1854년)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 정동(貞洞), 삼청동(三淸洞),
순화동(順化洞) 등에서 살았다. 이 때 명필(名筆)로 알려진 조송운(趙松雲)이
붓글씨로 쓴 적벽부(赤壁賦)를 모사하였는데, 진위(眞僞)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듯 한 때 글씨 쓰기에 열중하였으나,
‘말기(末技)에 머물 것이 못된다’ 하여 그만 두었다고 한다.
18세(1858년) 때에 밀양 박씨와 결혼하였으나, 불과 1년 만에
책을 싸들고 입산하였으며, 심오한 고전에 탐닉하면서 시문에 일가를 이루면서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0세(1860년)에 퇴계(退溪)의 글을 읽고
학문이 있음을 알고 매우 기뻐하였다고 하는데,
“내가 20세에 비로소 『퇴계집』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서 뜻이 간절하던 차에,
퇴계 선생의 현몽으로 학문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고 훗날 술회하였다 한다.
당시 충청도 아산(牙山)의 신양(新陽)에는 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廷淳) 등의
제자를 가르치던 임헌회의 명성이 드높았다.
이에 그는 21세(1861년) 때 신응조(申應朝)의 소개를 받아 임헌회를 만났다.
이때부터 임헌회의 가르침 아래 그의 학풍을 계승하기 시작하였고,
23세(1863년)에는 우의정 박규수(朴珪壽)가 보양관(輔養官)으로 천거하였으나
왕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고, 25세(1865년)에는 부친이 임헌회를 따라
공주(公州)의 명강(明剛)으로 이사하여 스승을 매일같이 모셨다.
30세(1870년) 때에는 스승 임헌회가 왕을 알현하고 전우를 인재로 추천하였다.
36세(1876년)에 임헌회가 공주 성전(星田)으로 이사하자 그곳과 가까운 연기(燕岐)
죽안(竹岸)으로 이사하였다. 임헌회의 사후(死後)인 38세(1878년)에 충북 음성(陰城)
삼현(三峴)으로 이사하였고, 42세(1882년)에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이 천거하여
8월에 선공감 가감역(繕工監 假監役)과 감역(監役)에,
9월에는 전설사 별제(典設司 別提)와 강원도 도사(江原道 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상주(尙州),장암(壯岩),문경(聞慶),진천(鎭川),
만죽(晩竹),문천(文泉),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길렀다.
54세(1894년)에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5세(1895년)에 박영효(朴泳孝)가 수구학자(守舊學者)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간재를 죽여야 한다고 고종에게 주청하였으나,
고종은 오히려 그를 순흥 부사(順興 府使),중추원 찬의(中樞院 贊議)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 해인 1896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弑害)당하자 전우는 상소문을 올려
역적을 처벌할 것을 역설하였다. 또한 단발령(斷髮令)의 공문을 보고 통곡하며
모든 자손들과 문인들에게 죽음으로 유학의 전통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
같은 해 7월 최명희의 주선으로 충청도 태안의 근흥면에 와서 2년 7개월간
후진 교육에 몰두하여 서산과 태안 지역의 유풍(儒風)을 크게 진작(振作)시켰으며,
59세(1899년)에 공주 금곡(金谷)으로 이사하였다.
65세(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세 차례에 걸쳐
‘청참오적(請斬五賊)’이란 제목의 상소문을 올려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경세문(警世文)’등을
지어 이토오 히로부미를 탄핵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상소를 올렸으나
중간에서 방해를 받아 전달도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매국노들의 사주를 받은 대신들이 그를 죽이라고 고종에게 주청하였으나,
임금은 ‘너희들은 짐에게 선비를 죽인 누를 입게 하려 하느냐’고 하였다 한다.
68세(1908년)에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라고 하였으니 나도 바다로 가겠다!」라고 하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위도 서쪽에 있는 왕등도(旺嶝島)로 들어갔다.
왕등도는 본래 왕이 한 번 오를 만한 경치가 좋은 섬이라 하여 왕(王)등도였는데,
간재가 이곳에 온 후 이를 불경스럽다 하여 왕(旺)등도로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간재선생문집의 연보『艮齋先生文集의 年譜」에 의하면,
태안에 머물 당시에도 이미 부해지의(浮海之意)를 품어 안민도(安民島)로 옮기려 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거론하게 될 것이다.
이듬해 제자들의 간청으로 군산도(群山島) 구미촌으로 거처를 옮겨서 학문을 폈다.
70세(1910년)에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은 간재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을
통곡하다가 다시 왕등도로 들어갔다. 이듬해 11월 일본인 경무부 고등관이
경비선을 타고 왕등도에 들어와 그의 동태를 살폈다. 이 때 간재는 벽에
‘萬劫終歸韓國士 (만겁이 흘러도 끝까지 한국의 선비요,
平生趨付孔門人 (평생을 기울여 공자의 문인이 되리라)’라는
시 (이 시구는 현재에도 계화도의 계양사에 전하고 있다). 를 게시하여 놓고 있었다.
이를 본 일경도 진짜 한국의 선비를 만났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한다.
72세(1912년)에 전우는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왕등도에서 나와 군산도에서 머물다
부안의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고, 계화도(繼華島 ;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제자들이 수집한 간재문집 전고(前稿)를 완성하였다.
이후 74세(1914년)에는 그의 입해(入海) 이후의 감상을 적은 ‘해상산필(海上散筆)’을
완성하였다. 78세(1918년)의 고령에 이른 전우는 손자를 앞에 불러 놓고,
“나는 한국의 유민으로서 어찌 타국에 입적(入籍)하겠는가.
(吾以韓國遺民 豈肯入籍於他邦)
너도 죽을지언정 도장을 찍어 입적을 허락해서는 안된다
( 汝雖死不可奈章)” 라는
글을 써주면서 왜적(倭籍)으로 입적을 하지 말도록 하였다.
79세(1919년)에 고종의 석연치 않은 붕어(崩御) 소식을 접하고,
삼년 상복을 입기 시작했다. 또한 1920년 5월에 동아일보 사장 박영효가
주자학의 의리를 비판한 데 대하여, 이를 성토하는 등 고령에 이르러서도
그의 기개는 꺾일 줄을 몰랐다. 82세(1922년)에 제자들이 수집한 원고를
친히 교정하여 간재문집 후고를 완성한 전우는 이해 7월 4일 82년의 생애를 마쳤다.
9월 13일 전북 익산의 선영에 묻히었는데 그의 영구를 따른 사람이 2천여 명이었으며,
장례를 보러 몰려든 사람은 6만여 인파가 넘었다 한다.
학자의 참모습을 보여주며 현실의 동요 속에서 일생을 은거로 지낸
그의 문하에는 수많은 문인(門人)들이 배출되었다.
그의 학풍은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
창수(蒼樹) 정형규(鄭衡圭),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양재(陽齋) 권순명(權純命),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병암(炳庵) 김준영(金駿榮),
후창(後滄) 김택술(金澤述) 등 3,000여 명을 헤아리고 있다.
계화도의 계양사(繼陽祠)와 의령의 의산사(宜山祠), 지리산의 백운정사(白雲精舍),
고창의 용암사(龍巖祠), 정읍의 태산사(台山祠), 태안의 안양사(安陽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간재집(艮齋集)』 30책, 『간재사고(艮齋私稿)』 30책,
『추담별집(秋潭別集)』 2책 등이 있다.
전우는 조선성리학의 마지막 시기를 장식한 대표적 학자였다.
율곡 이이와 우암 송시열을 이은 기호학파의 학맥을 계승하고 있으며,
간재학파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여 당대의 사상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전주에서 출생하였지만,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수학기를 보내며 기호계열의 학자들과 인연을 가졌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율곡에 연원을 두게 되었고, 신응조의 소개를 통해
낙론계열의 맥을 잇고 있었던 전재 임헌회와 사제관계를 맺게 되면서
낙론의 계통을 이어받게 된다.
(이재-김원행-박윤원-홍직필-임헌회-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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