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기운(成璣運) * (1877(고종 14)-1956)
자는 순재(舜在), 호는 덕천(德泉)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근세의 성리학자(性理學者), 경북 청도(淸道) 출신으로 성두채(成斗彩)의 아들이다.
이종기(李種杞)의 문인인 반동락(潘東洛)에게서 수학하고,
1900년 전우(田愚)의 제자가 되었다. 유영선(柳永善) 등과 교유하였다.
1912년 전우를 따라 계화도(繼華島)에 가 부양재(扶陽齋)를 짓고 수학하였다.
1917년 창씨 개명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청도경찰서에서 네 차례 고초를 당하였다.
1946년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의 경제서(經濟書)를 수집하여 시대에 맞는 제도를
완성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곽종석(郭鍾錫)․서찬규(徐贊奎)․송병선(宋秉璿)․
송병순(宋秉珣)․송병화(宋秉華) 등을 두루 방문하여 학문을 물었으나
결국 전우의 제자가 되었다.
*사 상
그는 성리설(性理說)이나 의리론(義理論)에서도 스승을 계승하여
성존심비설(性尊心卑說)이나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이 성현(聖賢)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임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 때 성(性)을 높이고 심(心)을 낮추는 의도는
심을 리(理)라고 보아 자의(恣意)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데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천(天)은 본체로서 순수한 선〔純善〕의 리(理)이며, 심은 작용으로서
본래는 선[本善]한 것이라고 대조하였다.
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한 데 비하여,
본선은 선하지만 끝내는 불선(不善)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라 하면서,
천(天:理 또는 性)에 근본을 둘 수 있으나, 심에 근본을 둘 수는 없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성리학의 실천적 성격을 강조하여, 심성설(心性說)은 성(性)이 선함을 밝혀
행위의 표준을 삼아 자신의 행동이 선에 어긋나는지를 점검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학계가 실천에 힘쓰지 않고 개념 분석에만 몰두하여 학파가
대립하는 현상을 빚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한편 『대학(大學)』의 선후본말론(先後本末論)에 입각하여 유교의 도덕을 근본으로,
서양의 기술을 말단으로 보아 도덕의 주체적 확립 위에서 기술을 활용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저서에 『덕천집(德泉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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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이야기)
성기운(成璣運) -덕천 선생의 항일
선생의 본관은 창녕 (昌寧)이며 휘는 기운(璣運)이요. 자는 순재(舜在)이고
호는 덕천(德泉)으로 대제학 회곡 성 석용(大提學 檜谷 成 石瑢)선생의
17세 손이며 동주 성 제완(東洲 成 梯完)선생의 후께 이다.
선생은 1877년 (고종 14년) 11월 13일 이서면 신촌동 신안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풍모가 청수하고 전성이 총명하여 나이 8세에 이미 시를 지어
그 학문에 어른들이 감탄하였고 13세때 향시 (鄕試)에서 문장은 낭철하고
응대 동작이 의면해서 만장의 칭송을 받았다 한다.
성장하여 한말의 대유학자 간재 전 우(艮齋 田 愚)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고을은 물론 전국적인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고종의 국상 때 상경 하였는데 정부고관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알고
벼슬길에 오르라고 간곡히 권유하고 추천하나 이를 거부하고 사양하다 지쳐
급급히 귀향하였다 한다.
1904년 (고종 41년)부터 일본이 내정간섭을 시작하여 오다 급기야
통감부(統濫部)를 설치하여 주권을 유린하며 오다. 드디어 한일합방을 감행하고
일본은 무단정치를 시작하면서 조선총독부는 민적령을 전국에 내려 호적을 만들기
시작하자 전국의 유림들은 이를 반대하여 물 끓듯 하였다.
우리 청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반대 하였으나 시일이 흐르고 왜경들의 강압과 회유에
빠저 몇몇 선비들을 제외하고는 초지를 굽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다.
그러나 선생은 호적뿐만 아니라 조세, 부역등 각종 일들을 무시하고 반대 하였 다.
이때 일제 경찰이 선생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선생의 운인 손 영석 (孫 永錫)의
노옥일기(虜獄日記)에 의하면 1917년 (丁已) 5월 20일에 청도경찰에서 부장과
수명의 순사들이 들이닦쳐 선생을 연행 하려하자 크게 꾸짖어 말진기를
"내가 대한국민인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냐"하니 왜경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호적을 하지 않느냐" 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한국유민 (韓國遺民)인데 왜 너희들 왜적의 호적을 해야하느냐 더구나
나는 우리 한국땅에 살고있는데 너희들의 호적에 들어가야 하느냐"하니
왜경들은 할일없이 돌아갔다.1917년 (丁已) 5월24일 또 다시 찾아온 왜경에 의해
청도경찰서에 압송되어 구금되었다. 선생은 일체의 식음을 전폐하였다.
다음날인 25일에 순사 수명에 이끌려 사법실에 들어서니 소위 왜인경찰서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노기등등하여 고함을 치며 말하기를
"너는 역적이 아니냐" 선생은 정객하여 말하기를
"나는 내나라 한국을 지키기 위한 것인데 역적이 될수 있느냐.
너희들을 위하는 것이 바로 역적이 되는것이다.
너희들은 천지신명이 굽어 보는것도 두렵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그들은 한편 위협하고 한편 회유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마음은 척석같았다.
노끈 그들은 음식 먹기를 권하고 욕설을 퍼붓고 하여도 선생은 끝내 듣지 않았다.
다음날은 신생을 밀실에 불러내어 또 위험하고 달래고 하였으나 선생은 시종일관
"나는 대한유민(大韓遺民) 이니 너희들 일본호적을 찰 수 없다"라고 대서 하였다.
이때 선생을 회유하기 위해 내려온 대구도경무부장이 이를 보고 4일동안 이나
한 모금의 물과 한 술의 밥도 먹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의연할 수 있다니
정말 진실한 의사(義士)라고 말하고 석방 하였다.
그 후 6월 11일에 구금되어 15일에 석방되고 7월 3일 구금되어 15일에 석방되고
6월19일 대구 경찰에서 내려와 모진 고문과 설유를 하였으나 끝내 불응하니
또다시 총독부 고관이 내려와 설유와 협박을 해도 선생은 태연히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고 너희들은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어찌 너희들 호적으로 고칠수 있겠는가.
나는 대한유민(大韓遺民)이다" 하고 크게 꾸짖었다 하며 ,
또한 일본 경찰들이 음식을 권하니 선생 은
"원수들인 너희와 말도 하기 싫은데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하며 물도 마시지 않으니
일경들 마저 경한하였다 한다. 일경들의 박해는 계속하여 8월 1일에 구금되어
8월 5일에 석방되고 한것이 20수일이 있다.
이와 같이 갖은 고문을 당하고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 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호적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의사가 다니며 치료하였으나
선생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왜경들은 당황하여 석방 하였는데
경찰서에서 나올때 지팡이를 주니 선생은 '너희들 지팡이는 필요없다' 하며 꼿꼿이
걸어서 나왔다 한다. 이렇게 선생은 끝내 호적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름을 쓸 때는 이름위에 반드시 대한유민(大韓遺民) 이라고 썼다.
이와 같이 민족정신이 투철하고 고고한 절의 (節義)로서 일제에 항거 파였다 한다.
1953년에 충현서원장(忠賢書院長)을 지냈으며 1956년 80세로 돌아 가셨다.
문집(文集)이 있다. 1972년에 문인들과 유림들이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에
사우(祠宇)를 세워서 병산사(屛山祠)라 하여 선생의 유덕을 기리며 향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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