巨儒 자료 2.

*추연 권용현 *

달성문지기 2011. 4. 3. 19:50

* 권용현(權龍鉉) * (1899-1988) .

호는 추연(秋淵) 관향은 화산이다.
이 시대 마지막 선비라고 불릴만한 추연, 합천군 초계면 유하리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단발령 이후 모두가 머리를 깎았지만 유독

고집스럽게 상투를 틀고 갑사로 만든 갓끈을 사용한 의관을 늘 정제해

예를 닦고 오직 학문에 몰두한 선비다.

추연은 1899년 만송(晩松)공 재직(載直)과 초계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만송공이 꿈에 용을 본 상서러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용현’이라 지었다.  

10세 때 통감과 사략, 그리고 사서를 두루 섭렵할 정도로 총명하고 영특했다. 
 시암공(是菴公)에게 편지를 올려 가르침을 청하자

“10여세의 어린 나이에 옳고 그름에 대한 구분이 엄격하고 하는 말이 도의(道義)에

 가까우니 어디에서 이런 소년을 얻을까”하면서 칭찬을 했다.

(시암공은 이직현(李直鉉)이란 선비로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14~5세때 조부와 조모상을 잇따라 당해 여막에서 만송공을 모시고 상례를 행하며

정성을 다하였다. 만송공이 예서(禮書) 읽는 일을 따라 곁에서

‘가례증해(家禮增解)’와 ‘상례비요(喪禮備要)’등의 책에 실린 여러 학설들을 연구하여

따라야 할 것들을 결정하고 시행할 수 있는 것들을 밝혀 적절한 내용을 기록하여

‘상례쇄록(喪禮鎖錄)’이라는 책을 엮었다. 

 당시 서구의 풍조가 밀려 들어와 옛 학문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풍조에 휩쓸리는 추세였다. 사람들이 시류를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권유하면

 “죽을지은정 다른 뜻을 가지지 않겠다”면서 스스로를 다짐했다.

그리고 경서와 성리서 등를 얻어 필사하고 외우면서 그 내용을 묵묵히 탐구했다.

또 정자와 주자의 학설들을 참고하여 태극 음양 동정의 이치와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사단칠정의 학설을 반복 탐구하고 정리하여 강론했다. 


 20세 때 간재 전우를 계화도로 찾아뵙고 심성(心性)에 대한 뜻을 질정했다.

당시 왜인들이 만동묘의 향사를 저지하니 영남의 여러 선비들이 항의하여

 향사를 받들 계획으로 만동묘로 나가기로 했는데, 추연도 부친의 명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여러 선비들이 왜인들에 의해 구류되고 심문을 당해 향사를 받들지 못하고

 물러나오게 되자 선비들과 함께 원통한 마음을 삼킨 채 화양동을 나왔다.

이어 우암 송시열의 묘소를 참배했다.
 어느날 율곡을 만나 이끌어 주는 꿈을 꾸고 더욱 분발하여 힘쓰면서

숭모하는 마음을 가졌다. 또 마을 뒷산 이름이 운현산(雲峴山)이고 마을 이름이

유화(柳華)인 것을 따라서 서실 이름을 ‘운화당(雲華堂)’이라 하여

주자와 우암을 숭모하는 뜻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윤을 지향하고 안자를 배우며 운곡을 조술하고 화양을 숭앙한다

(志伊學顔祖雲宗華)”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벽에 붙이고 스스로 공부를 하니

인근의 많은 선비들이 글을 지어 그 뜻을 기렸다.
 25세 때 제문을 지어 간재 전우의 소상(小祥)에 나가 곡을 하고

간재의 제자들인 석농 오진영, 흠재 최병심, 덕천 성기운 등과 강론하고 질정했다.

이어 호서의 결성(結城)으로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을 찾아뵈니,

지산은 한 차례 만남에서도 매우 기대하고 인정하면서 서로의 만남이 늦은 것을

지극히 한스럽게 생각했다. 지산은 면우 곽종석과 파리장서를 주도한 충청도 선비였다.

수십일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남당 한원진, 병계 윤봉구 등의 종택을 방문하고 사당을 참배했다.
나라에서 단발령이 내리자

외로운 성이 모두 적의 침입을 받았는데, 패전한 군사들 어디로 가야 하나

모래 밭에 나뒹구는 뼈가 될지언정 오랑캐로 살다가 죽을 수야 있나”라고 시를 지어

스스로 굳은 의지를 나타내 보였다.
 항상 왜인들을 피하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모가 연로해 결행하지 못하고 조용히 기다리면서 압박이 조금 느슨해지면

언제나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유람하며 쌓인 울분을 달랬다.

가야산 두류산 금산 등의 경치를 벗들과 약속하여 두루 구경하면서

가슴 속의 회포를 풀었던 것이다. 또 안동, 경주 등을 찾아 선현들의 유적들을

두루 관람하였으니, 이는 세상의 도가 무너진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옛날을 그리는데서 나온 것이었다.

광복이 되자 “ 오늘의 일은 한 때의 시원한 일이기는 하나

우리 힘에 의하여 얻은 것이 아니고 서양의 힘을 빌려 된 것이니

반드시 서양에 예속되어 그들의 지휘를 받고 그들의 법을 준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랑캐를 몰아내고 금수를 불러들인데에 불과하다.

어떻게 우리 선비들이 발을 들여 놓을 곳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다. 또 송산 권재규에게 편지를 올려 물 밑에 잠긴 용처럼

위로 올라가지 않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맞는 일임을 논하였다.
 6․25가 일어나자

외세에 의지하여 동쪽끼리 서로 해치고 있으니 이 어찌 이웃 도적을 불러들여

 자신의 집안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모든 일은 서양이 그 빌미가 된 것이다”라고 했다.
 문인들이 서실을 지어 수양할 곳을 마련하자 ‘태동서사(泰東書社)라고 편액을 하니

태암산 동쪽에 있다는 지명을 취하면서, 동양의 도술(道術)을 보호해 지키겠다는 뜻을

담은것이다. 추연은 태동서사에서 세상 일을 멀리한 채 오직 후학들을 권장하여

진취시키고 선현들의 도를 강론하여 밝힘으로써 실낱같은 우리 도의 명맥을 잇기위해

일생을 보냈다.일찍부터 이학도(理學圖)를 만들어 벽에 붙여 두고 반성을 하면서

우리 선비의 학문은 이학이다. 글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고 함양하여 이치를 보존하고

힘써 행하여 이치를 따라야 한다. 이 세가지를 번갈아 힘써야 할 것이니

이중 어느 하나라도 폐지한다면 그것은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학문은 반드시 주경(主敬)으로 그 근본을 삼아 지식을 지극히 하고

힘써 행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향년 89세이다.
추연의 강학 소리 끊어진지 오래된 태동서사엔 지금 쓸쓸한 가을 정막만이 드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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