巨儒 자료 2.

* 학봉 * 김성일 *

달성문지기 2011. 4. 3. 10:46

* 김성일 [金誠一) * (1538(중종 33)-1593(선조 26)   

본관 의성(義城). 자 사순(士純). 호 학봉(鶴峯). 안동 임하(臨河) 출생.

1556년(명종 11) 도산서원으로 가서 이황(李滉)을 만나 그 문하생이 되었다.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正字)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 ․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1579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해 함경도순무어사가 되어 영흥 ․함흥 ․삼수 ․길주 ․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목사가 되어 도내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당시 김여물(金汝岉)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9년 의정부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

그해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사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 발언 때문에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왜란 초에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실제 황윤길의 발언이 있은 직후 조정은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는 당시 민심을 상당히 동요시켰다.

이에 상소를 올려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내치(內治)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왜란 초 경상도 일대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金?)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기색이 있자, 양자를 화해시켜 이를 원만히

수습하기도 하였다.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며, 저서로는

《해사록(海錄)》 《상례고증(喪禮考證)》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

등을 남겼고, 1527년 후손들에 의하여 문집 《학봉집》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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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이다.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으로 명종 19년(156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修學)하고 선조 1년(1568)에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서 시작하여 정자(正字) ․ 검열(檢閱) ․

대교(待敎)를 거쳐 1572년 봉교(奉敎)가 되어 노산묘(魯山墓 : 후의 단종)의 봉축과

사육신(死六臣)의 복권을 진언하였다.

다음해에 형조 ․ 예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수찬(修撰)으로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겸직하였다.

1574년에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다시 정언(正言)이 되고 이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선조 10년(1577)에는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溟)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힘썼으며 돌아와 교리(校理) ․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 순무 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1583년 황해도 순무 어사(黃海道巡撫御史)로 변방의 방비를 살피고 돌아와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재직할 때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우고

김굉필(金宏弼) 등을 제향하고 선비들을 학문에 힘쓰게 하였으나

1586년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1590년 사성(司成)으로 통신 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정세(日本情勢)를

살피고 돌아왔다. 이때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이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데 반해, 그는 침략의 기세가 없다고 장담하였다.

 집권세력인 동인(東人)은 그의 복명을 택했는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였다. 이때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있던 그는

파직 송환되던 중 우의정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처벌을 면하고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 임명되어 항전(抗戰)에 공을 세웠다.

함양 ․ 거창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모으고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

정인홍(鄭仁弘) 등을 지원하며 의병과 관군의 조화를 꾀하였다.

다시 경상우도 관찰사로 돌아와 김시민(金時敏)으로 진주성(晋州城)을 지키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 순찰사를 겸하여 대왜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순국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했으며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중추가 되어 그 학통(學統)이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으로 계승되었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능하여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저술하였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 주빈서원(酒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영계서원(永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인조 27년(1649) 문집인 《학봉집(鶴峰集)》이 간행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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