巨儒 자료 2.

* 사계 김장생 *

달성문지기 2011. 4. 3. 11:51

* 김장생(金長生) * (1548년 7월 한성-1631년 충청남도 논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이며, 조선의 유학자,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평산신씨로 이간공(夷簡公) 신영(申瑛)의 딸이다.

 *생애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되었다.

1578년(선조 1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올라 참봉․현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으로 명나라의 군량미 조달에 공을 세웠으며,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군량미를 조달하는 데 힘쓰면서 후금과의 화의에 반대하였다.

이듬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연산(連山)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에 전심하며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송시열․송준길 등의 유학자를 배출하여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였다.

또한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주류를 형성하여, 동방 18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들 김집은 유홍(兪泓)의 딸과 결혼하여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 뒤 아버지 김장생의 스승인 이이의 첩의 딸 이씨를 첩으로 들였다.

며느리 유씨가 사망하자 예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사계는 아들이 재혼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김집은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과 평생동안 욕을 보았는데 이제 다시 장가 든다고 해도

꼭 먼저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습니까" 라며 거절하였다 한다.

1641년(인조 19) 묘를 연산군 고정리 우수산(連山縣 高井里 牛首山)으로 이장 하였으니,

현재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로 선조비 허씨 묘의 후편이다.

1657년(효종 9)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며, 1717년(숙종 44) 문묘(文廟)에 종향되고

연산 돈암서원(遯巖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등

10여 서원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 (見朝鮮王朝實錄, 沙溪全書, 神道碑文) 

            경서판의, 가례집람, 송강행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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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金長生)은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창릉 참봉에 천거되었다.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명나라 사행(使行)을 가는 아버지를 수행한 뒤,

돈녕부 참봉이 되었다. 이어 순릉 참봉․평시서 봉사(平市署 奉事)․동몽 교관․

통례원 인의를 거쳐 1591년 정산 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호조 정랑․군자감 첨정(軍資監 僉正)으로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다.

그뒤 남양부사․안성군수를 거쳐 1600년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종친부 전부(宗親府 典簿)가 되었다. 1602년에 청백리에 뽑히고 이듬해

익산군수로 나갔으나, 북인(北人)이 득세하게 되자

1605년 벼슬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했다.

 광조가 즉위한 뒤 잠시 회양․철원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1613년(광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등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사사되거나 옥에 갇힌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다.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장령에 오르고, 이어 성균사업(成均司業)․집의․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면서 원자(元子)를 가르치는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뒤 좌의정 윤방(尹昉)․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천거로 공조 참의를 지냈으며,

이어 부호군을 거쳐 1625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다음해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워 이이․성혼을 제향했으며, 같은 해

용양위 부사직(龍?衛 副司直)으로 옮겼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는 한편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청나라와의 강화에 반대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했다.

그해 형조 판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물러난 뒤 용양위 부호군(龍?衛 副護軍)으로

낙향했다.1630년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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