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목(許穆) * (1595년~1682년)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 ).본관은 양천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및 학자이다.
동시대의 정치가 우암 송시열과의 예송논쟁으로 유명하다.
이황의 제자인 한강 정구에게 수학하였으나, 박지화의 제자였던 부친 허교와
외조부인 임제의 영향으로 천문, 지리, 도가 등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글씨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조예가 깊어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미수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인에서도 청남에 속하며, 고결한 인품 덕분에
남인이 실각한 뒤에도 88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 생애.
허목은 젊은 시절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왕의 심기를 거슬러 나라에선 그에게
평생 과거를 못 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스스로 산림에 묻혀 글만 읽다가 효종 때에
56세 나이로 말단 벼슬인 능참봉이 내려졌고 그 후 80세에는 정승까지 올랐다.
* 예송
이 부분의 본문은 예송입니다.
그 뒤 효종의 죽음으로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자
송시열은 중국의 주례에 따라 부모상에 자녀는 3년복, 자녀 중 장남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남 이하는 1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참고하여
기년설(朞年說 : 만 1년)을 주장하였으며, 윤휴가 이의를 제기하자 의례 참최장의
주석을 찾아서 서자는 장자가 될 수 없고 본부인 소생 둘째 아들 이하는
모두 서자로 간주한다는 자료를 증거로 제시하였다.
남인이 계속 정치 공세를 가하자 의례의 3년조의 소에 가통(家通)을 계승하였더라도
3년 상복을 입지 않는 사유인 사종지설과 체이부정, 정이부체설을 찾아서 제출하였다
그러나 남인은 송시열을 탄핵하여 역모로 몰아가려다가 실패하였고,
3년설을 주장하며 송시열이 효종의 왕통을 부정한다는 정치 공세성 모함을 하며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기년설을 관철시키고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송시열은 서인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했고,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남인의 공격을 받고
1675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 장소가 옮겨졌다.
남인이 예송 논쟁을 빌미로 송시열을 역모로 몰아가려 하자
송시열을 두둔하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중 송시열의 제자이며 대전 회덕의
유생인 송상민이 1679년 음력 3월 12일 예송 논쟁의 전말을 정리하여
책 《석곡봉사》를 지어 올리며 송시열의 처벌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송시열의
구명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실패하고, 분노한 숙종은 송상민을 사사했다.
남인들은 다시 송시열을 죽이기 위해 고묘(종묘에 고하는 일)를 계속하여 주장하였다.
* 일화
조선시대 학자이며 정치가이고 노론의 영수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대감이
그만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병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아들을 불렀다.
“지금 곧 미수대감께 가서 내 병세를 소상히 말씀드리고 화제(약방문)를 좀 얻어 오너라.”
그 말을 들은 아들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아니, 장안에 허다한 의원들을 놔두고 왜 하필이면 미수대감에게 화제를 부탁하십니까?
천부당 만부당한 분부이십니다.
만일 화제에 독약이라도 넣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고 펄쩍 뛰며 가족들과
한결같이 만류를 하였다. 그러나 우암은 아들에게 채근하였다.
“어서 가서 미수대감을 뵙고 오너라.” 거듭 재촉하는 송시열의 명(命)에
아들은 내키지 않는 발길을 옮겨 하는 수 없이 미수 허목(許穆)대감을 찾아가
우암의 병세를 이야기하고 화제를 지어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미수 대감이 적어 준 화제를 펴 보니 약재 중에
독약인 비상(砒霜)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했던 일인데 실제로 독약이 들어 있는 것을 본 가족들은 대경 실색하였다.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는 미수가 아버님에게 위해(危害)하기위해
약에 비상을 넣은것이라 생각하고 당장 아버지 송시열에게 달려가서
“보십시오. 당초에 저희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아버님을 독살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아무리 남인이지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은 조선초기
훈구파(조선을 건국하는데 공훈을 세운 공훈자들을 중심으로 성균관등의
官을 출신으로 하는 파, 즉 관학파라고 하기도 함)와
사림파(지방의 명문 서원이나 향교등의 출신)의 대립에서
훈구파는 서서히 세월이 가면서 도태되고 지방명문서원을 중심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눠지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며
노론은 또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뉜다.
이렇듯 복잡한 당파싸움의 계보로 볼때 미수 허목이 동인의 계보인 남인인 반면,
우암 송시열은 그 대척점에 서 있었던 서인의 계보인 노론의 영수였으니
정치적 사안마다 사사건건 서로 발목을 잡고 1~2차 예송논쟁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사활을 걸고 싸워 1차 예송논쟁에서는 송시열의 승리로
2차 예송논쟁에서는 허목의 승리로 서로간엔 정치적으로는 서로 죽여야할 적임에,
송시열의 아들이 미수 허목대감의 약방문을 보니 비상을 넣은것을 어찌
순수한 의도로 볼 것인가..? 그러나, 우암은 가족들이 미수를 성토하는 것을
크게 꾸짖고, 곧 화제대로 약을 지어오게 하였다.
송시열의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끝까지 돌리지 못하고 끝내
아버지와 미수 허목을 믿지 못하고 비상을 두쪽으로 쪼개어 절반은 버리고
절반만 넣어 약을 끓여서 아버지께 올리니 그것을 꿈에도 모르는 우암은
끝내 독약이 든 약을 마시고야 말았다.
우암은 미수가 의술에 밝고 공명정대한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비상이 든 약을 의심없이 마실수 있었으며, 미수는 또한 우암의 덕망과 도량을
믿었기에 화제를 물리치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비상을 절반만 넣은 사실을 까맣게 모른 송시열은 약을 먹고 난 후에도
병의 차도는 있으나 완전히 낫지 않아서 아들을 불러 다시금
미수 대감에 보내니 미수대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들에게 물었다.
“분명히 비상을 넣고 끓였는가..?”
이에 송시열의 아들은 대답하기를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대답을 하였다.
“사실은 이만코 저만코하여 비상을 절반만 넣고 끓였나이다.”
이 말을 들은 미수 허목은 가슴을 치며 탄식하기를
“어허...! 이 일을 어찌할꼬..?
자네 부친의 병은 오줌을 많이 마셔서 몸안에 요석이 끼여서 그리 된것을...
그래서 비상으로 그것을 녹여야 하는데 자네가 날 믿지 못하여 비상을 완전히
넣질 않아서 요석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것일세 ”
이에 아들은 미수에게
“그럼 다시 비상을 넣어 약을 지으면 되지않습니까 ”하고 말 해보지만
돌아온 미수의 대답은
“자네의 부친과 내가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고
친구로써의 우정까지 학자로써의 양심까지 다른것은 아닌데도,
자네가 날 믿지 못하여 부친의 병을 고칠수 없게 되었네.
비상(砒霜)이란 너무 독하여 일생에 단 한번밖에 쓰지 못하는 약이라서
자네 부친의 병을 고칠 방법은 이제 없다네.” 하고 대답하였다.
우암은 미수를 믿었으나 아들의 믿음이 부족한 댓가로
송시열은 죽을때까지 이 병에 시달리다가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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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화를 예지했던 허미수
흔히 허미수를 유학자로만 알고있는데 한편으로 그는 도력이 높은 이인(異人)으로도
전해진다. 허적 의 탄생과 관련하여 허미수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한 일화가 전해진다.
허목과 허적은 같은 양천 허씨로 12촌지간이다.
허미수는 한집안 사람인 허적의 아버지와 한때 절에서 함께 공부를 했다.
그런데 그 절에서는 매월 보름이면 스님이 한 명씩 없어졌다.
허적의 아버지가 살펴보니 이무기가 나타나 스님을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이를 안 허적의 아버지가 이무기를 칼로 죽이자 이무기의 기운인 파란 줄기가
그의 집으로 뻗치고 들어갔다. 허미수는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판단하여
그 집에서 아들을 낳는 족족 없애도록 충고했다.
허적의 아버지는 그의 충고를 따라 두 아이를 없엤다.
그리고 세 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허적’이었는데, 허미수는 그 아이가 허씨 가문의
멸족을 초래할 것으로 예견하고 죽이려 했으나 허적의 아버지는 더는 죽일 수 없노라며
아이를 살려두었다. 그러나 허미수는 그 아이로 인한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미리 알고 친척간에 파적(破籍)하였다고 한다. 허적은 아주 뛰어난 신동이었으나
훗날 결국 역적이 되어 허씨 가문에 화를 입히게 된다.
허적은 허미수와 함께 후에 남인을 영도하여 서인인 송우암을 공격하였는데,
미수는 강경한 입장을 띤 데 반해 허적은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여 둘의 사이가 벌어진다.
허적과 갈등을 겪은 미수는 1678년(숙종 4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당시 우의정이던 허적과 그의 아들 허견(許堅)의 실정과 죄상을 논핵하다
왕의 노여움을 산다. 이를 계기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허미수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를 볼 때, 허적에 대한 설화는 이무기를 죽이고 나서
그 척(戚)으로 허씨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예측한 허미수의 선견지명을 잘 보여준다.
‘장차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그때는 이곳을 떠나라’
그런데 미수의 예지능력은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영험한 <척주동해비>를 통해서
최근에 더욱 부각되고 있다.
당시 삼척은 폭풍과 해일 피해가 잦아서 고기잡이배가 다 부서졌을 뿐만 아니라,
파도 때문에 바닷가에 나가지 못하여 어민들이 굶어죽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해일이 몰려올 때는 오십천(五十川)을 거슬러 올라 바닷가로부터 30리 가량 떨어진
거리에 있는 동헌마루까지 바닷물이 밀려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미수가 돌에다가 직접 글씨를 써서 바닷가에 비석을 세우자 신기하게도
그 이튿날부터 물이 평소의 3분의1밖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다음날에는 비석이 묻힌
주춧돌까지만 들어왔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바닷물의 침수피해를 입었던 곳까지도
백성들이 논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수가 삼척을 떠난 뒤 반대파인 노론계의 인물이 신임부사로 왔는데,
그는 그 비석의 내력을 듣고 허무맹랑하다고 여겨 비석을 깨뜨려 버린다.
그러자 다시 풍랑과 해일이 몰려왔고, 당황한 신임부사는 다시 비석을 세우려 했는데
미수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또 하나의 비석을 만들어 두어서 그 비석이 오늘날까지
유명한 ‘삼척 동해비’로 남아있게 되었다. 미수가 이 비석에 새긴 문장을 일컬어
‘동해송(東海頌: 동해바다를 예찬한 글)’이라고도 하는데, 육경(六經)에 뿌리를
둔 것으로 도가(道家)적이며 주술적인 비유들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미수는 이 비석을 세우면서
‘지금 같은 작은 해일은 내 비로 막을 수 있지만 장차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내 비석으로도 막을 수 없으니 그 때는 이곳을 떠나라’고 경고하면서
‘앞으로 불(火)로 난리가 난 후에 물(水)로 큰 난리가 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5년 전인 2000년 4월부터 강원도 고성, 강릉, 삼척 등 영동지방에
해마다 대형산불이 일어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초대형 쓰나미가 동해안에서도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미수는 이미 그러한 일을 예견하면서 비석을 세웠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유학자이자, 전국의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며 도가의 인물들과도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기인으로서 그의 풍모를 보여준다.
* 민족사학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미수
허미수가 살아가던 17세기의 조선후기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백성들이 권력을 잡은 유학자들에 대한 정치적 신뢰가 떨어지던 시대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인들을 중심으로 한 주류 유학자들은 망한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으로 뭉친 중화주의 이념을 조선사회에 철저하게 강요하기 시작한다
유교 근본주의적인 사림들에 의해 주자성리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서가
강요되었으며, 성리학의 토착화 과정에서 조선에 중국문화 전한 기자를
성현으로 높여 추앙했고, 기자를 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정통론의 입장에서 그 중심에 놓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수의 신흥 비주류 지식인들은 주체적인 한민족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창립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민족주의 의식이 있는 비주류 유학자들은 단군조선을
역사적으로 부각시켜 단군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조선으로 한민족의 정통이
이어짐을 명확히 한다. 그들은 단군을 요순(堯舜)에 대치시켜 단군조선의 계보를
정립함으로써 단군조선을 요순시대와 함께 존재했던 이상사회로 높이고
조선문화의 기원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주장한다.
주로 남인과 북인계열의 학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했는데, 미수 역시 1670년대에
동사(東事)라는 역사서를 써서 단군조선에 대한 그의 주장을 펼친다.
미수는 그가 당시 정권의 주요 실세였던 남인의 영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주자학적 입장에서 우리민족을 중국과 구별하면서
단군을 민족의 수장으로 내세우는 ‘자주적 단군문화 정통론’을 추구하였다.
(동사)는 단군세가 (부여열전, 숙신씨열전, 기자열전, 위만세가, 사군이부, 삼한열전),
신라세가 (가락열전, 대가야열전),
고구려세가, 백제세가 (예맥열전, 말갈열전, 모라열전), 흑치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서술한 『동사』는 기존의 중화사대주의적인 사서들과는 상당히 다른
세 가지의 서술형태를 보여준다.
첫째, 한국사의 첫머리로 단군세가(檀君世家)를 내세워
단군조선이 우리역사의 기원임을 분명히 하고 조선을 중국과는 다른 또 하나의
독립된 천하질서로 상정하고 있다.
즉 한민족문화의 시발을 신시(神市)까지 소급시키면서 신시와 단군의 시대는
중국의 제곡, 당우시대와 자웅을 겨뤘다고 주장하면서
환인-신시-단군으로 이어지는 상고사 계통을 확립한다.
둘째, 그는 숙신, 예맥, 말갈 등 백두산 북쪽의 족속과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을
모두 함께 단군의 후손으로 인정하여 후에 20세기 초의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
영향을 준다. 이같이 부여계 국가들을 단군의 후예로 보는 시각은 고려말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조선 세조 때 권람의 『응제시주』에만 보이던 것인데,
미수가 이를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조선조 사서류에서 단군시발의 역사인식을 낳은
선구적인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셋째, 그는 당시 유가들이 신화적인 요소를 황당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배척한 것과는 달리 단군의 신이성(神異性)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단군의 순방한 정치가 1천 년간 지속되었다면서 이상정치의 연원을 요순이 아닌
단군 통치시대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보여주는 미수의 『동사』는 후에 민족주의 학자들의 역사관의
틀을 잡아주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숙종 말년에 소론 학자
노촌 임상덕(1683-1719)은 1710년대에 『동사회강(東史會綱)』을 써서
고대 한민족의 강역(江域)과 단군에 대한 사실을 고증하였고,
성호 이익(1681-1763)은 ‘삼한정통론’을 지지하면서 정통의 시작을
단군으로부터 삼았다. 이러한 입장은 제자인 순암 안정복(1712-1791)에게
전수되어 기자 이전에 단군시대부터 이미 원형의 유교문명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미수의 영향을 받은 담헌 홍대용(1731-1783) 이후
북학사상가들은 ‘조선=중화’라는 역사인식을 부정하는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을
표방하고 ‘조선=동이’라는 역사인식을 확립해간다.
이에 따라 화이론적인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인식은 부정되고 오히려 그동안
정통에서 제외되어 연구되지 않았던 발해왕조가 북학사상가들의 연구대상이 되면서
옥유당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海東歷史)』에서는
우리나라 왕조 중의 하나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다시 근대 민족주의 학자들인 신채호, 정인보 등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주게 되고 오늘날 현대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시금석이 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사대주의에 매몰되었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불교주의에 빠졌지만,
미수의 『동사』는 도가적인 입장에서 우리 역사 고유의 정통성을 복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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