巨儒 자료 2.

*열암 하시찬 *

달성문지기 2011. 4. 3. 18:57

* 하시찬(夏時贊) *  (1750, 영조 26-1828, 순조 28)

자(字)는 경양(景襄), 호(號)는 열암(悅菴), 본(本)은 달성(達城)이다, 


행장(行狀) 권중민(權中敏) 찬(撰):

공(公)은 1778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치상제절(治喪諸節)을 가례(家禮)에

일준(一遵)하였고 1790년에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의 문인(門人)이 되어

이기설(理氣說)과 명덕(明德)의 학(學)을 배웠으며

역학(易學)의 오지(奧旨) 탐색(探색)에 더욱 힘썼다.

또 선영(先塋)곁에 집을 짓고 향인사자(鄕人士子)들과 강논(講論)을 쉬지 않았으며

향음례(鄕飮禮)를 행(行)하여 자제(子弟)의 예양(禮讓)을 흥기(興起)시키며

가례(家禮)를 강(講)하여 촌속(村俗)을 비변(丕變)시켰다.

 

(팔예절요(八禮節要), (경예(經禮)답문(答問), (인물(人物)성설(性說).

열암문집(悅菴文集)  6권3책등의 저서(著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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悅菴文集(奎4358), 夏時贊(朝鮮)著.

          5卷 3冊 木板本 30×19cm.四周雙邊 半郭:20×14.3cm.有界 10行 20字.

          版心:下花紋魚尾.

     悅菴 夏時贊(1750-1828)의 詩文集.

1836년(憲宗 2) 從孫 正益 正昌에  의하여  간행 되었다.

夏時贊의 號는 悅菴, 본관은 達城, 大都督 欽의  후손이다. 

宋煥箕  李宜朝의 문인으로 벼슬은 하지 않았다. 後嗣가 없었다.

앞에는 李翊會와 洪直弼의  序가  있다. {권1}:詩 109수, {권2}:書 53편.

鏡湖에게 보낸 大學問目 疑禮問目을 비롯하여  張錫胤, 柳養善, 崔九錫 등에 보낸 것이다. {권3}:書 53편과 記, 序. 書는  徐興輔,  黃成烈, 徐麟淳 등과 교신한 것이며,

麗水亭記, 杜谷精舍記, 晩聾(徐寬修의 號)記,  徐喆甫追盧記, 敬養齋記 등 記 9편,

序로는 三省菴同遊序, 家牒序 등. {권4}:跋, 贊, 銘,  雜著로 書有家日用後, 傳巖詩稿跋,

 謹書明德人物性二圖後, 書居鄕雜儀後, 北郭遺事跋 등 跋  9편.

讀書贊, 深衣贊, 金鐵孫쇄盤銘 등, 雜著로 諸子晨謁辨, 答尙州疏會文,  徐景直字辭,

深衣裁制, 性說 등. {권5}:祈雨祭文, 上樑祭文과 祭文 22편, 哀辭  4편, 

 獨茂巖樓上 樑文, 行錄으로 守夢軒芮承錫行狀, 戶曹判書白仁寬遺事가 실렸다.

끝에 徐能輔와  尹鍾大의 跋이 있고 「歲丙申巖棲開刊」이라는 刊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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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하)氏   始祖: 하흠(夏欽)

하씨(夏氏)는 송나라의 귀화성씨로 본관은 달성(達城) 단본이다.

시조 하흠(夏欽)은 원래 송나라의 대도독으로 고려 제 17대 인종 때

우리 나라에 와서 귀화, 달성에 정착했다고 한다.

주요인물로는 고려 명종 때 효자로 정문이 세워진 하광신(夏光臣)과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등이 있다.

이 밖의 인물로는 하인경(夏仁敬)이 선조때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하운서(夏雲瑞)는 판관을 지냈다. 한편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고구려 산상왕 때 한평주 사람 하요(夏瑤) 등 1천여 가구가 고구려에 투항해오자

왕이 책성을 쌓고 그곳에서 살게 했다고 하는데 그 후손들이 지금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현재 대구를 비롯하여 경북의 달성과 경산, 경남의 밀양,

전북의 순창과 장수, 강원도의 원주지방에 많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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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무재(獨茂齋) *

                              * 위치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1동 188-1.
                                      * 시지정문화재 자료 제17호.

 

독무재는,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은거(隱居)하여. 후진양성에만 전념(專念)하여,

우리나라 예학(禮學)을 집대성한 선비, 하시찬(夏時贊)선생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과 유림(儒林)들이 건립한 재실(齋室)이다.

           고려말 달성군(達城君)휘(諱)용(溶)의 후예(後裔)로,
        관향(貫鄕)은 달성(達城), 호(號)는 열암(悅菴), 자(字)는 경양(景襄),
        학자(學者)들은 세칭(世稱) “열암선생(悅菴先生)으로 불렀다.


1750년(영조26)대구 수성구 만촌동에서 태어나, 1828년(순조 28)에 별세하였는데,

선생은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서, 팔례절요(八禮節要)를 저술하고, 열암문집을 남겼다.

 

“열암(悅菴)은 스스로 지킴이를 돈독(敦篤)히 하는자로, 자기 심신(心身)밖의 물질적

욕심이나, 이름을 알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나물국에도 배가 불렀으니,

이에 순정하고 익숙하여, 그 마음을 움직일수가 없었으니, 의리(義理)를
기쁘게 여기는 사람이였다”라고 홍문관(弘文館)대제학(大提學) 이익회(李翊會)선생은

열암문집(悅菴文集)서문(序文)에서 평(評)하였다. 또,

매산(梅山)홍직필(洪直弼)선생은 문집(文集)에서
“책을 읽고 혼자 꿋꿋이, 군자(君子)의 덕(德)과 의리(義理)를 지키며,

세상밖에 숨어서도 굳세고 단단해서, 속(俗)된 풍속(風俗)을 멀리하고,

고사감암(枯死?巖)하여 보지 아니하고, 알면서도 그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는,

능히 그 몸을 지키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열암(悅菴)이였다”라고 썼다.
이렇듯 선생은 불구문달(不求聞達)하여, 도백(道伯)의 벼슬에 대한 천거(薦擧)까지도

사양하고, 만년(晩年)까지 성현(聖賢)의 학문(學問)을 즐기고, 초라한 독무암서(獨茂巖棲)에 거처(居處)하였으니, 그때의 생활을 다음과 같은 시(詩)로 남겼다.


 

非山非石一孤巖 : 산도 아니고 돌도아닌 한 외로운 바위를
古號流傳獨茂巖 : 예부터 독무암이라 불리며 전해왔다.
人獨依巖巖獨茂 : 사람이 홀로 바위에 의지하고 바위는 홀로 무성하니
端宜棲息主人巖 : 바르게 사는 주인의 바위임이 마땅하다.


이 때가 선생이 39세 되던 1789년(정조13)인데,  일찌기 당대의 석학(碩學)이던

경호(鏡湖:李宜朝)선생과 성담(性潭:宋煥箕)선생의 양문하(兩門下)에 출입하여,

경지(經旨)를 탐구(探究)하여, 날로 향인사(鄕人士)로 강학(講學)하니,
경향(京鄕)간의 석덕명사(碩德名士)들이 왕왕(往往)추후(推後)하고 종유(從遊)하시니,

계문(啓聞)하였다. 경상감사(慶尙監司)김의순(金義淳),정만석(鄭晩錫),김이재(金履載)가

존례경대(尊禮敬待)하기가 지나쳤고, 대구부사(大邱府使)서유승(徐有升)이

아들 흥보(興輔)를 보내서 배우게 하고,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래(宋祥來)가 소문을 듣고 친교(親交)를 부탁했으며,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이 글을 주어 도(道)를 논(論)했다.

대구부사(大邱府使) 서인순(徐麟淳)은 예(禮)를 다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며,

인읍수령(隣邑守令)들도 많은 자제(子弟)를 보내 배우기를 청(請)하였다.


 

향음례(鄕飮禮)를 행(行)하니 향자제(鄕子弟)들이 예양(禮讓)에 힘쓰게 되고,

투호의(投壺儀)를 설(設)하니 고구(故舊)들이 예유(藝遊)를 즐기게 되고,

가례(家禮)를 하니 향속(鄕俗)이 크게 변(變)하게 되었고,

향약(鄕約)을 행(行)하여 유풍(儒風)을 바로 잡았다.
부상(父喪)때는 애훼과도(哀毁過度)하고 여묘삼년(廬墓三年)하니,

이 적학지행(積學砥行)하고 불구문달(不求聞達)이라,

이에 경상감사(慶尙監司)가 천거(薦擧)하고자 하며, 단, 공(公)의 이름이,

자기 선친(先親)의 휘(諱)와 같으니, 개명(改名)을 할수 없느냐고 물었으니

“예(禮)에 고자(孤子)는 불개명(不改名)”이라 하고 사절(謝絶)하였으니.

가(可)히 당세(當世)의 일유(逸儒)라 하고, 하향(遐鄕)의 사표(師表)라 하였다.

 

사림(士林)에서는 1824(甲申)년에 열암학계(悅菴學契)를 창건하여,

약위상회(約爲常會)하고, 1826(丙戌)년에는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강당(講堂)을 세워, 독무암서(獨茂巖棲)라 이름 하였다.

1900(庚子)년에 중창(重創)하여 세일제(歲一祭)의 의례(儀禮)를  행(行)하고,

1950(庚寅)년에는 드디어 경덕사(景德祠)를 창건(創建)하고 향사(享祀)하였다.

이후로 매년 3월 상정일(上丁日)에, 각지(各地)의 유림(儒林)들이 모여

춘향(春享)을 지냈던 것이 현재까지 행(行)하여져 오고 있다.

 

원래 선생은, 현재의 독무재(獨茂齋)가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500m지점에,

이미 독무암서(獨茂岩棲)란 조그만 재실(齋室)을 짓고 그기서 기거(起居)하면서

제자양성(弟子養成)과 학문연구(學問硏究)에만 전심(專心)하였다.

 
선생의" 팔례절요"저술(著述)에는,
관혼상제(冠婚喪祭) 사례의(四禮儀)는

유가일용편(有家日用篇)으로, 향음주례(鄕飮酒禮),향약례(鄕約禮),투호례(投壺禮),

사상견례(士相見禮)의 사례의(四禮儀)는  거향잡의편(居鄕雜儀篇)으로,

이 두편(篇)으로 팔례절요(八禮節要)을 간행(刊行)하였고,

외에도, 경례문답(敬禮問答), 인물설(人物說) 등이 있다,

별세후에 1834년경에 열암문집(悅菴文集)3권이 출판(出版),규장각에 소장되었던것을,

지난 2008(戊子)년에는 後孫들이 國譯하여, 전국  유관기관(有關機關)에 반질을 하였다.


그 당시 효목동에 있었던 그 독무재(獨茂齋)는, 1967년 도로(道路)의 개설(開設)로 인하여 1968년 4월에 현 위치로 이건 (移建)하였다. 독무재 안에 있던 장판각(藏板閣)에는,
그동안 팔례절요(八禮節要)와 열암문집(悅菴文集)의 판각(板刻)이 보관되어 왔으나,

판각(板刻)은 2007년에 안동 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하였으며,

이 건물은 좀 더 큰 규모로 개축(改築)하여. 지금은 그동안 문중내에 산재(散在)되였던

각종 고문고(古文稿)를 포함, 문서,문집(文集)들로 가득 찬 장서각(藏書閣)이 되었다. 
지금의 독무재는, 재실본체(本體)와 경덕사(景德祠) 그리고 장서각(藏書閣)이

한곳에 모여, 그 위용(偉容)을 뽐내고 있으며, 달성하씨(達城夏氏) 후손(後孫)들이

매년 유사(有司)를 정(定)하여, 관리(管理)는 비교적 잘 되고 있다.       
                                                                                           (글 :  夏聖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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